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여인들

봉건제도에 반기 든 마지막 황비 “문수”

화성인터넷신문 | 기사입력 2015/03/03 [12:03]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여인들

봉건제도에 반기 든 마지막 황비 “문수”

화성인터넷신문 | 입력 : 2015/03/03 [12:03]

어느 나라의 황족이나 왕족의 마지막은 모두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청나라의 마지막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행 속에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인이 있다.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황비 액이덕특 문수(额尔德特·文绣)다.

 

마지막 황비 액이덕특 문수(额尔德特·文绣)

 

만주 액얼덕터씨 단공의 딸 문수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한족 출신인 어머니가 꽃시장에 나가 꽃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귀족 출신이지만 빈곤한 가세로 인해 문수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문수가 8세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업성적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사랑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녀가 13세 되던 1921년 황궁에서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혼사 문제를 두고 황실의 제일 어르신인 경의(敬懿), 영혜(榮惠), 단강태비(端康太妃)와 대신들이 의논해 문수(文绣)와 곽부노 완용(岁的郭布罗 婉容) 두 명이 최종 간택 되었으나, 단강태비는 문수(文绣)의 가난한 집안과 외모를 문제 삼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문수(文绣)는 황비(皇妃)가 완용(婉容)은 황후(皇后)가됐다.

 

황비 복식을 갖춘 문수(文绣)

 

문수(文绣)는 입궁 후 궁 생활 또한 녹녹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황제 덕에 그녀는 9년간 생과부로 지냈다고 한다.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실 어른들에게 매일 같이 문안을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천진으로 나온 후에도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여전 했고, 완용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사촌언니가 찾아와 그녀에 “세상은 이미 변했다” “부의(溥儀)는 더 이상 황제도, 아무것도 아니다. 법에도 남녀(男女)가 평등 하다고 쓰여 있다”며 이혼을 권했다. 그녀 역시 불행한 결혼생활로 힘들었기에 사촌동생의 불행을 그냥 보고만 볼 수 없었다.

 

1931년 8월 25일 마침내 문수는 결심하고 동생인 문산(文珊)과 함께 산책을  핑계로 정원(靜園) 빠져나와 천진 시내의 국민호텔로 갔다. 여기서 문수는 자신을 모시던 태감에게 편지를 내어주며 황제에게 전하라고 명하고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황비의 혁명’이라며 문수(文绣)를 지지했다. 이를 접한 부의(溥儀)도 어쩔 수 없이 3가지 조건 하에 합의 이혼을 한다. 이혼 조건은 이랬다.

 

1. 부의는 문수에게 위자료 50만원을 지급한다.

2. 문수 궁에서 사용했던 자신의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

3. 이혼 후 문수는 부의의 명성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황비 문수(文绣)와 황실 여인들

 

이혼 후 문수는 어머니가 있는 북경으로 돌아와 한 사립소학교의 국문 선생님으로 일했다. 그도 오래가지 못해 황비였다는 신분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 살다가 친구의 소개로 유진동(刘振东)이라는 1947년에 재가해 평범하게 살다 1953년 9월 18일 심장마비로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지만 끝내 그 굴레에서 벋어날 수 없었던 비운의 여인 청나라 마지막 황비 문수(额尔德特·文绣), 그래도 짧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4년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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